1. 참선의 선결조건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이다. 자기 마음의 오염이 없어지면 진실로 자성(自性)의 참 모습을 본다. 오염이란 바로 망상과 집착이며, 자성이란 곧 여래의 지혜와 덕상이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 같이 갖추고 있는 것으로,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 만약 망상과 집착을 여의면, 자기의 여래 지혜와 덕상을 증득하여 곧 부처가 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곧 중생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무량겁을 내려 오면서 어리석게 생사의 구렁텅이에 빠져 오염된지 오래이므로, 능히 그 자리에서 단박에 망상을 벗어나 실답게 본래 성품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참선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의 선결조건은 바로 망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망상을 버릴 것인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것으로 "쉬면 곧 깨닫는다"고 하신 이 '쉼' 만한 것이 없다.
선종은 달마 조사께서 중국에 오시고부터 육조 혜능 대사에 이른 후에 선풍이 널리 퍼져 고금에 떨쳤다. 그러나 달마대사와 육조 스님께서 학인, 공부하는 사람, 참선학자들을 가르친 가장 긴요한 말씀 중에 "모든 인연을 한꺼번에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하신 말씀만한 것이 없다.
모든 인연을 한꺼번에 쉬어버린다 함은 온갖 인연을 다 놓아 버린다는 뜻이며, 그래서 "온갖 인연을 다 놓아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라고도 하셨다. 이 두 구절의 말씀은 실로 참선의 선결조건이며, 이 두 구절의 말씀과 같은 결과에 도달하지 못하면 참선은 단지 말 뿐이고 성공할 수 없어, 그 문 안에 들어서는 것도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온갖 인연에 뒤 덮히고 휘감겨 생각 생각이 생멸한다면, 그대는 어디 참선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온갖 인연을 다 놓아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참선의 선결 조건임을 우리가 이미 알았다면, 어째서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가. 수승한 사람은 한 생각을 아주 쉬어 버려 곧바로 무생(無生,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의 마음자리)에 도달하고 단박에 깨달음을 증득하여 털끝만치도 얽매임이 없게 된다. 그 다음 사람은 이(理)로써 사(事)를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모두 거짓 이름일 뿐이며, 원래 나와 자성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물은 다 꿈과 같고 환(幻)과 같으며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나의 이 사대색신과 산하대지는 자성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바다 가운데 뜬 거품과 같아 일어났다가 꺼졌다 하지만 본체를 장애함이 없다.
일체의 환과 같은 생주이멸 현상을 따르면서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통째로 놓아버려 죽은 사람처럼 되면 자연히 육근 육진의 반연하는 식심이 떨어져 나갈 것이며,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고 애착하는 마음도 모두 소멸될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 몸을 통한 아프고 가렵고 괴롭고 즐거움과, 배고프고 춥고 배부르고 따뜻함과, 영화롭고 욕되고 살고 죽음과, 화복길흉과, 헐뜯고 칭찬하고 얻고 잃음과 안전하고 위태롭고 험하고 평탄함 등을 모조리 도외시해 버리고, 이런 식으로 헤아리는 것도 놓아 버리고, 하나도 놓고 일체도 놓아서 아주 완전히 놓아 버려야만, 모든 인연을 놓아 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인연을 다 놓아 버리면 망상은 스스로 없어지고 분별은 일어나지 않으며 집착을 멀리 여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되어, 자성광명이 온통 환히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참선의 조건이 구비된 것이며, 다시 노력하여 진실로 참구하면,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볼 수 있는 분(分)이 있게 된다.
2.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근래에 참선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기를, '법(法)이라 하는 것이 본래 법이 아니며, 한번 말에 떨어지면, 곧 실다운 뜻이 아니다. 이 한 마음을 밝히면 본래 부처이며 바로 그 자리에서 아무 일도 없고, 모든 것이 제각기 눈앞에 이루어져 있어, 수행을 말하고 증득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마구니의 이야기다' 한다.
달마스님이 동토에 오셔서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자신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한다"[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하심으로써 대지의 모든 중생이 다 부처임을 아주 분명하게 일러 주셨다. 누구든지 바로 이 자리에서 이 청정한 자기의 성품을 알면, 일체에 수순(隨順, 상황을 따름)하되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24시간 행주좌와(行住坐臥,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마음이 도무지 변하지 않으니, 이것이 지금 다 이루어져 있는 부처이며, 마음 쓸 필요도 없고 힘들일 필요도 없으며, 다시는 해야 할 일도 없어, 털끝만치도 말이나 생각이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부처를 이루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이며 가장 자유로운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있는 일이므로 밖으로 구할 필요가 없다. 대지의 일체 중생이 오랜 겁이 지나도록 사생육도에 윤회하며 영원히 고통바다에 빠지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고, 성불하여 상락아정을 얻기를 원한다면, 부처님과 조사의 지극한 말씀을 진실로 믿어야 한다. 만약 일체를 놓아 버리고, 선도 악도 모두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부처를 이룰 것이다. 그래서 제불보살과 역대 조사께서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겠다고 발원하신 것이니, 이것은 아무 근거 없이 공연히 큰 발원을 하고 큰 소리를 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법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며, 부처님과 조사께서 되풀이해서 천명하시고 간절하고 정성으로 부촉(咐囑, 부탁하여 맡김)하신 진실한 말씀에는 터럭만큼도 헛되거나 거짓된 것이 없다. 대지의 일체 중생이 무량겁 이래로, 생사고해에 빠져서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하면서 윤회를 그치지 않으니, 이는 마음이 미혹하고 전도되어 있어,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과 합했기 때문이다. 마치 순금이 똥구덩이에 빠진 것과 같아서 사용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 더러움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은 대자비의 마음으로 부득이 팔만 사천 법문을 설하여, 각양각색의 근기가 서로 다른 중생들의 탐진치와 애착의 팔만 사천 습기의 병을 대치(對治, 대응하여 치료함)하신 것이니, 마치 순금 빛깔 위에 여러가지 더러운 때가 끼어 있으므로, 그대로 하여금 대패로 깎고, 솔로 털고, 물로 씻고, 헝겊으로 닦아내어 깨끗이 하도록 하신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모든 방편문이 다 묘한 법이며, 모두가 생사를 해결하여 성불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의 근기에 적합한가 아닌가가 문제될 뿐, 굳이 법문의 높고 낮음을 구분할 것이 아니다.
중국에 전해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법문은 선종, 교종, 율종, 정토종, 밀교인데, 이 다섯 가지 법문은 각인의 근기와 성향에 따르기 위한 것이니 어느 한 문만 수행해도 무방하다. 한 문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니, 오래도록 변함없이 나아가면 반드시 성취할 것이다.
3. 화두참선법
종문은 참선을 위주로 한다. 참선이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기의 본래면목을 참구하여 뚫는 것이니, 소위 '자성을 밝게 깨쳐, 본래 성품을 투철히 보는 것'[明悟自心 徹見本性]이다. 이 법문은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보이심으로부터 달마 대사께서 중국에 오셔서 전래하신 이후에 이르기까지 그 공부에 착수하는 방법은 여러 차례 변천이 있었다.
당, 송 이전의 선사들은 일언반구에 바로 도를 깨달았으며, 스승과 제자간의 전수도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하는 것에 불과하여 어떤 실체가 있는 법이란 있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묻고 답하는 것도 그때 그때 방편으로 속박을 풀어주는 것에 불과하여, 병에 따라 약을 줄 뿐이었다.
그러나 송대 이후 사람들의 근기가 하열해져서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니, 비유해서 말하면 '일체를 놓아라'거나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 해도 도무지 놓지 못하며, 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생각하는 식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가 되자 조사 스님들이 부득이 독으로써 독을 공격하는 방법을 채택하여 학인에게 '공안을 참구하라', 또는 '화두를 보라'고 한 것이다. 심지어 하나의 죽은 화두를 물고 늘어지되 긴급히 계속하여 한 순간도 놓치지 않도록 한다. 마치 늙은 쥐가 나무궤짝을 뚫을 때 같이 한 군데만 계속 파면 뚫어질 때까지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한 생각으로써 만 생각을 물리치는 것이니 이는 실로 부득이한 방법이다. 마치 나쁜 독이 몸 안에 있어, 칼로 째서 치료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것과 같다.
옛 사람들의 공안이 많으나, 후에 와서는 오로지 화두를 보라고만 가르쳤다. 예컨대 '이 송장 끌고 다니는 것은 누구인가' 하는 화두나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어떤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父母未生前如何是我本來面目] 하는 화두를 보라고 하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제방에서 많이 쓰는 화두는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는 것인데, 이 화두는 실은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다 마찬가지이며 모두 너무나 평범하여 별로 특별한 것도 없다. 요컨대, 경을 읽는 것은 누구며, 주문을 외우는 것은 누구며,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은 누구며, 밥을 먹는 것은 누구며, 옷을 입는 것은 누구며, 길을 가는 것은 누구며, 잠자고 깨어나는 것은 누구냐 하는 것들인데, 모두 같은 내용의 화두인 것이다.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답은 바로 마음이다. 말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말의 머리요, 생각도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이다.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기므로 마음은 만법의 머리인 것이다. 실로 화두는 바로 생각의 머리[念頭, 생각 이전의 자리]이며, 생각 이전의 머리는 바로 마음이다. 요컨대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이 바로 화두인 것이다.
4. 화두와 관심
따라서 우리가 도를 알려면 화두(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자리)를 보아야 하며, 이것이 곧 마음을 관하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은 바로 마음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본다[看, 참구한다]는 것은 곧 마음을 관(觀)하는 것이다. 성품은 곧 마음이며,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고 하는 것은 관하는 자기 마음을 돌이켜 관하는 것이다. '청정한 깨달음의 상을 원만히 비추어 본다'고 할 때의 '청정한 깨달음의 상'이 바로 마음이며 '비추어 본다' 함이 곧 관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를 염하는 것이 곧 부처를 관하는 것이고, 부처를 관하는 것이 마음을 관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 화두를 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부처를 염하는 자기 마음을 관하는 것이며, 곧 자기 마음의 청정한 깨달음의 체를 관조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 성품의 부처를 관조하는 것이다.
마음이 곧 성품이고 깨달음이며 부처이다. 이것은 형상이나 고정된 처소가 없으므로 끝내 붙잡을 수 없다. 청정하게 본래 있는 그대로이며, 법계에 두루하여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고 가고 옴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본래 그대로 이루어져 있는 청정한 법신불인 것이다.
수행인이 육근을 모두 거두어 들여,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 곳을 살피면서 이 하나의 화두를 비추어 보면, 생각을 떠난 청정한 자기의 마음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면밀하고 담담하게 고요히 비추어보면, 곧 바로 오온이 모두 공(空)하고, 몸과 마음이 함께 고요하여 마침내 한 일도 없게 된다. 이때부터는 스물네시간 행주좌와에 여여부동하여, 날이 갈수록 공부가 깊어지면 견성성불하여 고통은 없어지고 제도하는 일은 끝날 것이다.
옛날 고봉 조사께서 이르기를,
"공부인은 이 화두를 살피기를, 마치 기왓장을 만 길이나 되는 깊은 못에 던지면 곧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이 하라. 이렇게 하여 만약 7일이 되도록 깨닫지 못하면 내 머리를 자르라" 하셨다. 함께 참구하는 이들이여, 이것은 몸소 겪어 본 분이 하신 말씀으로 진실한 말씀이며, 사람들을 속이는 허망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어째서 현대인들은 화두를 드는 사람은 많아도, 도를 깨치는 사람은 적은가. 이것은 요즘 사람의 근기가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부인이 참선을 하면서 화두를 참구해 들어가는 길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동서남북으로 분주하게 오가며 스승을 찾고 법을 묻기만 하다가, 늘그막에 이르러서는 한 개의 화두도 분명하게 다루지 못하게 된다. 어떤 것이 화두인지, 어떻게 해야 화두를 든다고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고, 한 평생 언구와 명상(名相, 이름과 형상)에 집착하여 화미를 가지고 마음을 쓰면서, "부처님을 참구하는 이는 누구인가?", "화두를 비추어 보라" 하면서 계속 하다보니 화두와는 정반대로 어긋난다.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본연의 무위대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일체를 받지 않는 임금자리에 도달하리요. 금 가루도 눈에 들어가면, 눈이 멀 뿐인데 어떻게 큰 광명을 볼 수 있겠는가. 가련하고 가련하다. 훌륭한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 도를 배우니 그 뜻은 비범하지만 결과는 한 바탕 헛수고일 뿐이니, 매우 슬프고 불쌍한 일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차라리 천 년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하루 공부를 잘못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 수행하여 도를 깨달음은 쉽고도 어려우며 어렵고도 쉬운 것이다. 이것은 전등을 켜는 것과 같아서, 알면 손가락 한 번 퉁기는 사이에 크게 광명을 놓고 만년의 어두움을 순간에 없애지만, 알지 못하면 기회는 놓치고 등불은 꺼져 번뇌만 더 늘어난다.
더러 참선을 하면서 화두를 들던 사람이 마군에 집착하여 발광하고, 피를 토하고 병이 나며, 무명의 불꽃이 커져 나와 남이라는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현저한 예가 아닌가.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잘 조화시켜서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운을 고르게 하기를 힘써서, 걸림도 없고, 나와 남이라는 소견도 없어, 행주좌와에 항상 현묘한 기틀에 오묘하게 계합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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